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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를 할 때면 정 선생은 팔짱을 끼고 본관 건물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내내 바라보곤 했다. 그는 좋은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한국인이 아니라 유럽인 같았다.

... 정 선생은 일생의 상당 부분을 맑스주의자로 살았지만 말년엔 개운치 않은 맑스주의의 비판자로 일관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지만, 나는 그의 ‘유럽인 같음’과 좀 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그는 그 시절 좋은 선생이었다. 명복을 빈다.


정운영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2년, 이 책이 나온 지는 한 해가 지났다. 벤야민을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유행도 아닌 책을 뒤늦게야 읽었다.
젊어서 맑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고, 늙어서까지 맑스주의자라면 그것 역시 바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렇담 정운영 선생은 꽤 현명한 삶을 산 셈이다. 그의 말년에 중앙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 낸 이 책은, 나이든 맑스주의자의 더이상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않는 - 더이상 계급문제에 연연하지 않는 - 달관한 '지혜'를 보여준다.


분배와 성장은 개혁과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며,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척도는 더욱 아니다.
[성장이냐 분배냐를 넘어서] 중 (161)


사회를 봄에 있어 '이론'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도 옳고 너도 옳구나 하는 황희정승식으로 스탠스를 부정한다면 자신의 입장, 자신의 처한 맥락, 자기가 발을 딛고 서있는 땅에 대한 태도를 잃게 되기 쉽다. 종내에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3인칭으로 관망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애초에 내 편 네 편으로 가를 대상이 아닌데도 우리와 저들, 동지와 적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녕 불화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음험한 계략이다. "군 복무 하려다 줄 잘못 서서 전-의경으로 가고, 위에서 폭력 시위 진압하라고 떠밀어서 방패 들고 떨고 있는" 그들은 정녕 네 편도, 저들도, 적도 아니다. ... 중앙일보가 마련한 이문열 씨와 황석영 씨의 대담에서 "이제 우리 누구를 편들지 맙시다"라는 다짐이 줄곧 귓전을 맴돈다.
[도나 노비스 파쳄] 중 (208-209)

성찰적 태도는 교조주의적 독단을 교정하는 데 유용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을 좀더 낫우고자 하는 에너지를 잠재워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지혜로운' 지식인으로서 그의 통찰은 훌륭하지만 그것이 우리 같은 죄 많은 세상의 젊은이가 '벌써부터' 가져야 할 덕목은 아니다. 아마도 천당에서는 그의 성찰이 인기 있을 것이다. 부디 평화 속에 영면을(Requiescat in pace).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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